연필로 글씨를 잘못 쓰면 우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지우개부터 찾습니다. 연필과 지우개가 한 세트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지우개가 처음부터 연필과 함께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흑연을 이용한 필기구가 사용되던 초기에도 사람들은 당연히 잘못 그은 선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무 지우개가 없었던 사람들은 무엇을 사용했을까요?
뜻밖에도 그 답 가운데 하나는 빵입니다.
지우개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단순한 문구용품 하나에도 재료의 발견과 화학 기술, 그리고 사람들이 기록을 수정해 온 방식의 변화가 함께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무 지우개가 없던 시대에는 빵을 사용했다
오늘날과 같은 지우개가 등장하기 전에는 연필이나 흑연 자국을 지우기 위해 여러 방법이 사용됐습니다. 그중 잘 알려진 방법이 부드러운 빵 조각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빵의 부드러운 속 부분을 뭉친 다음 종이 위의 흑연 자국에 문지르거나 눌러 자국을 옅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먹는 빵과 문구용품인 지우개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필의 원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필은 잉크가 종이 깊숙이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흑연을 포함한 물질이 종이 표면에 흔적을 남깁니다. 따라서 그 입자를 다른 물질에 달라붙게 하거나 종이에서 떼어낼 수 있다면 자국을 옅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빵 속은 이러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빵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식품이고, 시간이 지나면 마르거나 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필통에서 꺼내 사용할 수 있는 현대의 지우개와 비교하면 관리가 불편한 도구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빵을 이용해 흑연이나 목탄 자국을 조절하는 방법은 완전히 사라진 이야기도 아닙니다. 미술 작업에서는 재료와 표현 방법에 따라 빵 조각을 활용하는 전통적인 기법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고무는 어떻게 지우개가 되었을까?
지우개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것은 천연고무가 유럽에 알려지고 활용되면서부터입니다.
18세기 영국의 과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고무 성질을 설명하면서 연필 자국을 지우는 용도를 기록한 인물로 자주 언급됩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에드워드 네언은 고무를 연필 자국을 지우는 제품으로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에서 지우개를 뜻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 rubber도 '문지르다'라는 의미의 rub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영국 영어에서는 지우개를 rubber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합니다.
초기의 천연고무 지우개가 지금 사용하는 제품만큼 편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천연고무는 온도에 따라 성질이 변하기 쉬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품질이 나빠지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더운 환경에서는 끈적거리거나 형태가 변할 수 있었고, 추운 환경에서는 딱딱해질 수 있었습니다.
즉 연필 자국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좋은 문구용품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무 가공 기술이 지우개를 바꾸다
19세기에 들어 고무를 보다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가 가황(vulcanization)입니다.
찰스 굿이어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가황 기술은 고무의 물성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연고무에 황 등을 이용해 처리함으로써 온도 변화에 보다 안정적이고 실용적인 고무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무 가공 기술의 발전은 자동차 타이어 같은 산업 제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용품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우개 역시 그 흐름 속에서 더 안정적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우개는 모두 천연고무로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제품에 따라 합성고무나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계 재료 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됩니다. 제조사는 지우는 성능이나 부드러움, 마모 정도, 용도 등을 고려해 재료와 배합을 달리합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모두 비슷한 직육면체 지우개라도 직접 사용해 보면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어떤 제품은 부드럽게 닳으면서 연필 자국을 잘 지우고, 어떤 제품은 상대적으로 단단합니다. 미술용으로 사용하는 지우개 중에는 손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말랑한 제품도 있습니다.
'지우개'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서로 다른 재료와 목적을 가진 제품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우개는 어떻게 연필 자국을 없앨까?
지우개로 글씨를 지우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문지르기 시작하면 지우개 표면이 조금씩 닳으면서 작은 지우개 가루가 생깁니다. 동시에 종이에 있던 연필 자국은 점점 옅어집니다.
연필로 글씨를 쓸 때는 흑연을 포함한 미세한 물질이 종이 표면에 남습니다. 지우개를 문지르면 마찰이 발생하고 지우개 재료가 흑연 입자를 종이에서 떼어내는 데 도움을 줍니다. 떨어진 물질은 지우개와 지우개 가루 쪽으로 옮겨갑니다.
이 때문에 지우개는 사용하는 만큼 조금씩 작아집니다.
저도 새 지우개를 꺼냈을 때 모서리가 반듯한 상태를 좋아하는 편인데, 며칠만 사용하면 한쪽 모서리부터 둥글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지우개가 마찰 때문에 닳는다고만 생각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연필 자국을 제거하는 작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너무 강한 힘으로 지운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이 역시 섬유로 이루어진 재료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세게 문지르면 표면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얇은 종이는 구겨지거나 찢어질 수도 있고, 표면이 거칠어진 부분에 다시 글씨를 쓰면 필기감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종이와 연필, 지우개가 서로 별개의 문구처럼 보이지만 실제 사용할 때는 세 재료의 성질이 함께 영향을 주는 셈입니다.
지우개마다 지워지는 느낌이 다른 이유
문구점에서 지우개를 고르다 보면 생각보다 종류가 많습니다.
일반적인 사각 지우개뿐 아니라 미술용 지우개, 연필처럼 가늘게 생긴 지우개, 손으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반죽형 지우개 등도 있습니다.
용도가 다르면 필요한 성질도 달라집니다.
노트에 쓴 글씨를 지울 때는 넓은 면적을 빠르고 깔끔하게 지우는 것이 편합니다. 반면 세밀한 그림을 수정할 때는 원하는 부분만 정확하게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림에서는 지우개가 단순히 실수를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밝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연필 스케치를 해 보면 이 차이를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글씨를 쓸 때는 지우개로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 싶은 경우가 많지만 그림에서는 일부 흑연만 덜어내 명암을 조절하기도 합니다. 같은 지우개라도 목적에 따라 사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종이와의 궁합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표면이 거친 종이에서는 흑연 입자가 종이의 굴곡 사이에 더 많이 남을 수 있고, 부드러운 종이에서는 지우개를 사용할 때 느껴지는 감촉이 달라집니다. 연필의 경도와 필압 역시 결과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지우개 성능을 단순히 '잘 지워진다, 안 지워진다'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연필을 어떤 종이에 어느 정도 힘으로 사용했는지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무리
지우개는 작고 단순한 문구용품이지만 그 역사는 생각보다 흥미롭습니다.
고무 지우개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빵과 같은 재료로 흑연 자국을 지웠고, 고무의 성질이 알려지면서 이를 이용한 지우개가 등장했습니다. 이후 고무 가공과 소재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늘날에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지우개를 선택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연필이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도구라면 지우개는 그 흔적을 수정할 수 있게 해준 도구입니다. 기록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만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록을 수정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오래 남기고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연필보다 선명하고 지속적인 필기를 위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대표적인 도구가 바로 만년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깃털펜과 딥펜을 거쳐 잉크를 몸체 안에 저장하는 만년필이 등장한 과정과, 만년필을 기울여도 잉크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FAQ:
Q1. 지우개가 발명되기 전에는 정말 빵으로 연필을 지웠나요?
네. 고무가 지우개로 널리 활용되기 전에는 부드러운 빵 속을 이용해 흑연 자국을 제거하는 방법이 사용됐습니다. 빵이 흑연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기보다 종이 표면에 있는 흑연을 떼어내 자국을 옅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Q2. 지우개 가루가 생기는 것은 품질이 나빠서인가요?
지우개가 마모되면서 가루가 생기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지우개가 종이 위의 흑연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지우개 재료 역시 조금씩 닳습니다. 다만 지우개 가루가 생기는 형태와 양, 사용감은 제품의 재료와 설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Q3. 연필 자국이 지우개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필의 종류와 필압, 종이 표면의 상태 등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연필을 강하게 눌러 쓰면 종이에 물리적인 눌림 자국이 생길 수 있으며 흑연이 종이 표면의 굴곡 사이에 남기도 합니다. 이 경우 흑연을 어느 정도 제거하더라도 흔적이 보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강하게 지우면 오히려 종이 표면을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적절한 힘으로 여러 번 지우는 편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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